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알리다
4월 8일부터 6월 8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렸다. 이번 영화제는 스미스소니언 산하 아시아 박물관인 프리어 갤러리와 아더 M. 새클러 갤러리 주최로 프리어 갤러리의 메이어 오디토리움과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위치한 AFI 실버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상영해 큰 호응을 얻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한국 영화산업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성공을 거두며 한국 영화는 그 다양성을 무기로 세계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중적인 취향의 영화뿐만 아니라 독립예술영화까지 세계무대에서 고루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 영화사의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이 잇따라 복원, 상영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얻은 신상옥, 이만희, 김기영 같은 거장을 재조명하는 자리도 마련되고 있다.
‘워싱턴 한국영화제’는 관객들로 하여금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장훈 감독의 <의형제>, 강형철 감독의 <과속 스캔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같은 흥행작과 더불어,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칸 영화제’ 2010년도 수상작인 이창동 감독의 <시>와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 등이 상영되었다. 또 양익준 감독의 저예산 영화 <똥파리>와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둔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도 소개되어 재능 있는 신예 감독들이 한국 독립영화계에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하녀>(세계영화재단-회장: 마틴 스콜세지-복원본)를 비롯한 김기영 감독의 작품 세 편을 통해 관객들은 한국 영화의 고전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 관객들과 뜻깊은 만남 가져
올해 영화제의 정점은 임상수 감독과 관객들의 만남의 행사였다.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던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군의 신예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한 임 감독은 호소력 짙은 드라마와 블랙 코미디를 통해 현대 한국 사회의 민감한 문화, 사회, 정치적 화두를 다루고 있다. 이번에는 5월 6일부터 3일간 프리어 갤러리와 AFI 실버 극장에서 <하녀>,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등 임 감독의 작품 세 편이 상영되었으며,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는 600명 이상이 참석해 임상수 감독의 작품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하는 귀중한 기회를 누리기도 했다.
각 상영작별로 임 감독이 해당 영화를 통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한 질문이 다양하게 쏟아졌다. 고 김기영 감독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2010년작 <하녀>는 두 영화가 만들어진 시간적 간극, 즉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거대한 변화, 특히 ‘초고소득층’의 등장과 이러한 현상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질문을 촉발시켰다. 중산층 가족의 외도를 다룬 <바람난 가족>은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가족 관계의 붕괴와 관련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임 감독의 작품 중 정치색이 가장 짙게 배어 있으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을 극화한 <그때 그 사람들>은 한국 현대사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유산, 그리고 자국의 전직 대통령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렸기에 직면해야 했던 검열 문제 등 숙고를 요하는 논의로 이어졌다.
우리 영화제의 관객들은 항상 감독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는데, 특히 이번에는 그토록 흡인력 있는 방식으로 현대 한국 사회를 조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가 직접 자리해 자신의 작품을 관객과 얼굴을 마주하며 생생하게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더욱 뜻깊었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도 온․오프라인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한 덕에 한국영화제 관객은 지난 몇 년간 괄목할 만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상영작 대부분이 재미동포가 관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현재 워싱턴 한인사회는 이 지역에서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관객에 한국인과 현지 미국인이 고루 섞여 있다는 것은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고무적인 신호로, 향후 개최하게 될 영화제도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글-톰 빅(Tom Vick),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프리어&새클러 갤러리 영화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