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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코르딜레라스의 계단식 논 - 자연에 인간의 지혜를 더한 절경
감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쌀밥은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자 주식(主食)입니다. 다른 곡물에 비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영양학적으로 훌륭하며 맛도 담백하기 때문에 단연 인기입니다. 필리핀의 루손 섬 이푸가오 지방에는 필리핀 사람들의 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불가사의하고 아름다운 절경이 있습니다. 논이 존재할 수 없는 험준하고 가파른 산비탈에 끝도 없이 펼쳐진 ‘코르딜레라스의 계단식 논(Rice Terraces of the Philippine Cordilleras)’이 바로 그것입니다.
루손 섬의 코르딜레라스 산맥에 계단식 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약 2,000년 전입니다. 원래 평지와 강가에서 농사를 짓고 수렵생활을 하던 이푸가오족은 무더운 저지대를 벗어나 코르딜레라스 산맥 깊숙한 곳에 도달했습니다. 산악지역인 코르딜레라스는 기온이 낮아 날씨가 시원했으며 산꼭대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은 이들이 사용하기에 넉넉했습니다. 다만 농사를 지을 만한 평지가 없었는데, 이푸가오족은 농업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묘수를 떠올렸습니다.
이푸가오족은 산의 등고선을 따라 크고 널찍한 표지석(Marker stones)을 깐 후, 경사진 틈새 사이사이를 작은 자갈로 촘촘하게 메웠습니다. 단단한 나무로 주변 땅을 다지고, 바로 옆에는 같은 높이의 돌담도 쌓았습니다. 그 위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으며, 진흙을 발라 견고한 논둑을 완성했습니다. 둑 안으로는 물이 흐를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는데, 관개 시설이 닿지 못하는 논에는 대나무 관을 이용해 별도의 물길을 냈습니다. 이푸가오족은 산꼭대기에서 시작된 물이 한 계단에서 그 아래 계단으로 막힘 없이 흐르게 하였으며, 각각의 논에 동등한 양의 물이 배분되도록 조절하는 놀라운 기술도 선보였습니다. 수많은 논에 하나하나 빠짐없이 물을 전달하는 복잡하고 정교한 관개 시설을 오직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푸가오족이 세대를 거듭하며 아주 오랜 기간 만들어낸 코르딜레라스의 계단식 논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논과 가장 낮은 논 사이의 거리가 1킬로미터에 달할 만큼 규모가 커졌습니다. 사실 계단식 논은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구조는 아닙니다. 고지대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계단식 논의 형태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코르딜레라스의 계단식 논에는 그만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해발 700~1,500m의 매우 높은 지대의 깎아지른 듯한 경사면에 조성되었으며, 그 규모도 세계 최대입니다. 코르딜레라스의 계단식 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1천 세대에 걸쳐 내려온 그들의 지식과 경험이 빚어낸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코르딜레라스에서는 지금도 쌀농사가 계속됩니다. 이곳 사람들은 선조가 일군 삶의 터전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연간 농업 계획에 따라 자신들만의 규율을 지키며 협업합니다. 하늘에 닿을 듯 켜켜이 쌓아 올린 이곳의 계단식 논은, 심미적으로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 가능한 농사 체계’로 그 기술력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코르딜레라스의 계단식 논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탄생시킨 경이로운 풍경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이푸가오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발자취이자 자신이 나고 자란 터전이며 삶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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